트리니다드는 하바나보다는 훨씬 작은 아늑한 동네 였다. 옛 스페인과 무역을 하든 식민지 시절의 항구 마을로 아기자기하고 파스텔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콜로니얼 풍의 낮고 고풍스런 건물들로 코지한 느낌이 들었고 유명한 관광지답게 골목마다 관광객으로 그득했다.
트리니나드는 쿠바에서 손에 꼽히는 관광지이고 길가의 집들의 페인트 칠 상태나, 여기저기서 관광객을 받을 카사 객실 수를 늘리기 위해 공사하는 모습, 새로 지은 카사의 화장실이나 방 상태는 왠만하 호텔보다 좋고, 길가에 주차된 신차들을 보면 동네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든다.
제레미를 만난 건 동네 쿠바 국영 여행사인 Cuba Tour에서 예약한 Cayo Blanco에 가기 위한 배를 타는 선착장에서 였다. 나는 그날 아침 잔뜩 골이 난 상태 였다. 한 15분 정도 걸리는 선착장에 가기 위해 아침에 동네에서 타야 하는 픽업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탔는데 분명 10쿡에 (이것도 어마어마한 가격)에 타협해서 길가에서 택시를 탔는데 왕복 20쿡을 줘야 한다고 또 구라를 쳐서 택시 아저씨랑 아침 댓 바람부터 미친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쌈닭처럼 싸운 판이였다.
흥정하는 걸 원래 싫어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귀찮아 하는 내가, 외국 타지에서 중년의 택시 기사와 고함을 지르고 싸웠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웃기다. 무슨 깡인지. 대들다가 아저씨한테 맞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쿠바는 안전하다고 들었고 외국인에 대한 범죄는 중범죄로 처리된다고 했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고. 한 일주일간 동양에서 온 여자 관광객을 봉으로 여기는 성가신 쿠바노들한테 싸인 짜증이 그 택시 아저씨한테 폭팔한 듯 했다. 암튼. 나도 한 성깔하는 한국 여자란 말이다. 고작 몇 불에 핏대를 세우는 수고로움까지 할 필욘 없었지만. 그날 아침은 아무튼 전투 모드였다. 결국 나의 승리 -.-V
관광객이 생각보다 많았는지 원래 운영하는 멋들어진 중형 요트 말고 소형 배를 한대 더 운영하는 듯했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이 대부분이여서 쌍발 요트 사이에 그물처럼 해먹을 연결해 놓아 거기 누워 태닝을 하면 바로 인스타그램용 젯셋족 샷 나오는 큰 요트를 탔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 10인승 작은 보트에 탔는데 크기가 작아서 한 층 위에 작은 조정석에 운전하는 아저씨 옆에서 앉아서 배를 조정해보는 행운을 얻었다. 그 매에는 프랑스에서 부부 교사라는 가족과, 한 쌍의 러시아 커플과 나와 그리고 제레미가 타고 있었다. 한 시 간 정도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전형적인 배나온 50대 대머리 영국 아저씨인 제레미와 나는 서로 일행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히피도 아닌 반듯하게 생긴 중년 기혼 유럽 남자가 혼자 여행을 하는 건 드물고 손엔 결혼 반지가 없기 때문에 나는 제레미가 이혼남인 줄 알았다. 본인을 과거 자동차 회사 PR 매니저였다고 소개한 제레미는 점잔고 예의바른 영국 신사로서 은퇴 후 여행 블로그를 운영 중이고 쿠바는 2주간 혼자 여행 블로그 취재차 왔다고 했다. 자신의 첫째가 나랑 동갑이라며, 결혼한 두 딸이 있고 결혼 30년 차라고 했다.
섬에서 오가는 중 배 운전을 하시는 선장님과 짧은 영어로 손짓 발짓을 해서 대화를 나눴다. Casa Blanco로 가는 하루 excursion은 일인당 55불인데. 선생님 월급이 20불인 쿠바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하루 배로 실어나르는 인원이 40-50여명은 되니 총 2000불이 넘는 돈을 Cuba Tour는 받는 거다.
배로 가는 투어에는 간단한 점심도 포함되 있었는데 음식 맛은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쿠바는 제조업체가 없고 수입을 못해서 그런지 케첩 등 우리가 흔히 살수 있는 양념이나 조미료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소금, 후추와 중국 이민자의 영향으로 간장 등만 슈퍼에서 팔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점의 요리가 맛이 없다. 뭐 길가에서 파는 야채나 과일 수준을 보면 농약이나 비료를 안줬는지 볼품이 없다. 한국의 슈퍼에서 보는 상업적으로 재배해 광택나고 벌레 먹은 흔적이 없는 단정한 야채 과일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볼품이 없다. 과일의 당도도 낮다. 뭐 생각해 보면 쿠바 농산물은 다 유기농이다.
선장님에게 이 배의 소유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개인 소유란다. 그는 쿠바 공산당 높은 간부의 가족이란다. 쿠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관광객만이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쿠바에서 가장 좋은 직장은 관광관련 업체들이고, 국영 관광 기업인 Cubar Tour나 호텔 기업인 Cubanacan에서 일하는게 자부심이란다. 돈도 많이 벌고. 쿠바에서 제일 가는 관광지인 트리니나드에서 바다를 좋아하는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꼭 가는 무인도 섬으로의 one day excursion에서 배와 섬에서의 점심을 독점 공급하는 개인이 공산당 간부의 가족이라니..... 뭐 이건 땅집고 헤엄치기의 돈벌이지.....쿠바 혁명으로 인해서 모든 국인이, 무료 집, 의료 보험, 그리고 교육의 혜택을 누린다는 자부심을 하바나의 쿠바 혁명 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나 경제 통제 정책으로 모든 생산 수단을 정부가 소유하게 되면 결국 소수의 특권층이 손쉽게 이를 독점하게 되는 구나 싶었다. 경쟁이 있었다면 Casa Blanco로 가는 다양한 excursion 프로그램이 있었고, 섬의 편의 시설도 개발될 수 있을 텐데....라고도 싶고.
하루 동안의 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무인도의 푸른 캐러비안 바다에서 스노쿨링을 즐기고 돌아가는 배안에서 제리미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프랑스 가족이 라이드를 해줘서 택시 아저씨와 흥정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프랑스 남부 시골에서 온 학교 선생님 아저씨는 너무 유쾌하셔서 안되는 영어지만 우리 일행을 하루 종일 즐겁게 해주셨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지만 역시 프렌치 시크는 프렌치 시크였다. 매 방학마다 전세계를 여행하시고, 이번에는 고등학생인 막내 아들만 데려 왔는데 대학에 간 큰 딸은 이제 가족 여행에 안데리고 다닌다 했다. 아들도 올해가 부모 돈으로 다니는 마지막 여행이라고 앞으로 자신의 돈으로 여행을 가야된다고 했다. 다음 여름 방학에는 중국을 갈꺼라며 신나하는 목소리로 한국도 가보고 싶은데 어디에 가야 하냐고 나한테 조언을 구했다. 여름 휴가 한달을 위해 일년을 사는 유럽 사람들. 아직 미국과 수교 전이였기 때문에 택시나 관광지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이였다.
나는 한국에서 뉴욕에 온지 4개월 밖에 안된 이후에 쿠바에 왔기 때문에 이렇게 유럽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처음이였다. 쿠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유럽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많은 걸 배웠다. 낯선 곳에서는 모두가 친구고 모든 풍경이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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